한자 하나로 풀어내는 고대 시인의 유머와 인생철학
🍶 술과 시가 한 몸이 된 시인, 도연명
"오늘부터 술을 끊겠습니다!"
이 결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해왔을까요? 하지만 중국 동진 시대의 위대한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이런 결심을 했다는 것은 조금 특별합니다. 왜냐고요? 도연명은 중국 고전 문학사에서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가장 술을 사랑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연명은 자연 속 은거 생활과 강직한 인품으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그의 시 145수 중 무려 56수가 술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그가 작정하고 쓴 '음주(飮酒)' 연작만 해도 20수에 이릅니다. 술과 시가 한 몸이 된 시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49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쓴 '지주(止酒)'라는 시는 언뜻 보면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남은 생애 동안 술을 끊고 살았을까요? 그의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상 밖의 재미있는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20번이나 반복된 '止(지)' 글자의 비밀
도연명의 '지주(止酒)' 시를 보면 한자 '止(지)'가 무려 20번이나 반복됩니다. 시의 제목부터 '止酒(지주)', 즉 '술을 끊다'라는 의미로 시작하지요. 한 글자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요?
술을 끊으며(止酒)
도연명
성읍에 사는 것 그만두고 자유롭게 노닐며 스스로 한가하네.
앉는 건 높은 나무 그늘 아래에 멈추고 걷는 건 사립문 안에 멈추네.
좋은 맛은 텃밭의 아욱에서 그치고 큰 즐거움은 어린 자식에서 그치네.
평생 술을 끊지 못했으니 술 끊으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었네.
저녁에 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끊으면 일어날 수가 없네.
날마다 날마다 끊으려고 했지만 혈기의 작용이 멈추어 순조롭지 않네.
단지 술을 끊는 게 즐겁지 않은 것만 알고 끊는 게 몸에 이로운 것은 믿지 않네.
비로소 끊는 게 좋다는 걸 깨닫고 오늘 아침에 정말로 끊게 되었네.
이로부터 한결같이 끊어 나가면 장차 부상의 물가에 이르리라.
맑은 얼굴이 예전 모습대로 머물 것이니 어찌 천만년에 그치겠는가.
居止次城邑 逍遙自閑止 坐止高蔭下 步止門裏
好味止園葵 大歡止稚子 平生不止酒 止酒情無喜
暮止不安寢 晨止不能起 日月欲止之 營衛止不理
徒知止不樂 未信止利己 始覺止爲善 今朝眞止矣
從此一止去 將止扶桑 淸顔止宿容 奚止千萬祀.
* 도연명(陶淵明·365~427) : 중국 동진 말기에서 송대 초기의 시인.
이 시에서 '止(지)'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멈추다', '그치다', '끊다'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止(지)'에는 또 다른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바로 '최선의 경지'라는 의미입니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는 '止於至善(지어지선)'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최선의 경지에 이르러 머문다'는 뜻입니다. 도연명은 이런 의미를 활용해 자신의 삶과 술에 대한 태도를 교묘하게 표현했습니다.
시의 첫 여섯 행을 보면, 도연명은 '止(지)'를 통해 자신이 찾은 '최선의 경지'를 묘사합니다. 관직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사는 것, 높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사립문 안에서 거닐며 텃밭의 채소를 먹고 아이들과 즐거워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최선의 경지(止)'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 행부터입니다. "평생 술을 끊지 못했으니 술 끊으면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었네." 여기서부터는 '止(지)'가 '술을 끊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술을 끊으려 해도 잠도 잘 못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늘 아침에 정말로 끊게 되었다(今朝眞止矣)'고 말하지만, 이어지는 구절들은 미묘한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부상(扶桑)'은 동쪽 바다에 있다는 신비한 장소로, 여기에 '이를 것(將止)'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술을 완전히 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경지'에 도달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표현했습니다.
😏 도연명의 해학: 술 끊을 수 없음을 유머로 승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연명은 이 시를 쓴 후에도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그가 62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13년간, 그의 술 사랑은 변함없었습니다. 이 시는 사실 '술을 끊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유머러스한 고백이자, '止(지)'라는 글자의 중의적 의미를 활용한 언어유희였던 것입니다.
도연명이 얼마나 술을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는 많습니다. 그가 살던 곳에 있던 널찍한 바위는 술에 취한 그가 자주 드러눕는 바람에 사람들이 '취석(醉石)'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친구가 부임하는 길에 돈 2만 전을 주고 갔는데, 이 돈을 모두 술집에 맡겨놓고 조금씩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의 대표작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도 술에 대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는 마지막 관직인 팽택령에 나가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직도 세상이 평온하지 못하였으므로 멀리 가 벼슬하기는 꺼렸지만 팽택은 집에서 백 리쯤 되고, 공전(公田)의 수확으로 족히 술을 빚어 마실 수 있었으므로 응했다."
벼슬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빚어 마실 수 있는 수확'이라니, 이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요! 관직을 수락한 이유가 집과 가까운 데다 술을 빚기에 충분한 수확이 있어서라니, 도연명의 순수한 솔직함이 엿보입니다.
🌿 도연명의 삶과 시가 주는 현대적 의미
도연명은 벼슬을 여러 번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세속적 명예와 부귀보다 자연 속에서의 소박한 삶을 선택했고, 그것을 '최선의 경지(止)'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술이라는 작은 즐거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도연명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요? 아마도 완벽한 금욕주의보다는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탐욕은 내려놓되, 자신에게 작은 기쁨을 주는 것들은 적절히 즐기며 사는 중용의 삶 말이지요.
도연명의 '지주(止酒)' 시는 단순히 술을 끊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성찰의 결과물입니다. '止(지)'라는 한 글자를 통해 '그치다'와 '최선의 경지'라는 두 가지 의미를 절묘하게 엮어냄으로써,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 현대인의 '止酒'와 균형 잡힌 삶
물론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도연명처럼 술을 많이 마시면서 62세까지 사는 것보다, 적절히 술을 조절하며 더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연명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가치는 술 자체보다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때로는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키며, 그럼에도 자신만의 '최선의 경지(止)'를 찾아가는 여정. 이것이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도연명의 시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가 아닐까요?
다음에 "오늘부터 술 끊는다!"라고 다짐하다가 실패했을 때, 도연명의 '지주(止酒)'를 떠올려 보세요. 완벽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순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한 지혜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止(지)'는 어쩌면 완전한 절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경지'를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읍에 사는 것 그만두고 자유롭게 노닐며 스스로 한가하네.
앉는 건 높은 나무 그늘 아래에 멈추고 걷는 건 사립문 안에 멈추네."
- 도연명, '지주(止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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