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그러나 간격을 두라." 레바논 출신의 시인 칼릴 지브란의 이 말은 어딘가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면 더 가까이, 더 깊이 함께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왜 거리를 두라고 했을까요? 하지만 자연의 속삭임과 오래된 지혜에 귀 기울여보면, 이 '간격'이야말로 관계를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비밀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칼릴 지브란의 시와 우리 주변의 나무들에게서 '아름다운 간격'의 지혜를 배워봅니다.
사랑하라, 그러나 간격을 두라
너희 함께 태어나 영원히 함께하리라.
죽음의 천사가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신의 계율 속에서도 너희는 늘 함께하리라.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창공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되 그것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너희 영혼의 해안 사이에 물결치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같은 잔을 마시지 말라.
서로에게 빵을 주되 같은 빵을 먹지 말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화음을 내면서도 혼자이듯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서로의 가슴을 주되 그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신의 손길만이 너희 가슴을 품을 수 있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느니.
* 칼릴 지브란(1883~1931) : 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
시가 건네는 관계의 비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은 그의 시 「결혼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창공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되 그것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너희 영혼의 해안 사이에 물결치는 바다를 놓아두라. (...)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은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느니.
시인은 말합니다. 진정으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숨 쉴 공간, 즉 '틈'을 주어야 한다고요.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같은 잔을 강요하지 않고, 서로에게 마음을 주되 그 안에 가두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치 사원의 기둥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함께 건물을 떠받치듯,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깊은 통찰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영혼이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함께함이라는 것이죠.
'갈등'이란 단어 속에 숨은 경고: 칡과 등나무처럼 얽히지 않으려면 🌿
우리가 흔히 겪는 '갈등(葛藤)'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도 이 '간격'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칡(葛)은 주로 왼쪽으로, 등나무(藤)는 주로 오른쪽으로 줄기를 감아 올라갑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이들이 서로 얽히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서로를 옥죄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가깝게 얽혀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면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각자의 고유한 방향성을 존중하지 않고 무리하게 하나로 묶으려 할 때, 관계는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간격'이 필요하듯, 사람 사이에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심리적 거리'가 필수적입니다.
나무에게 배우다: 그늘이 아닌 햇살을 나누는 법 ☀️
칼릴 지브란은 참나무와 삼나무가 서로의 그늘 아래서는 자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서로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햇빛과 영양분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함께 부실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주변의 느티나무를 보세요. 화려한 꽃이나 향기는 없지만, 묵묵히 자라나 거대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쉼터(休=人+木)를 제공합니다. 수백 년을 살아가는 느티나무의 강인함은 홀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다른 존재에게 간섭하기보다 너른 품을 내어주는 데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나무도 사람도, 건강하게 자라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각자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을 가리지 않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떨어져 있어야 싹트는 것들: 거리와 생명의 신비 ✨
물리학적으로도 두 입자는 가까울수록 끌어당기는 힘(인력)과 동시에 밀어내는 힘(반발력)도 커진다고 합니다. 관계가 너무 가까워지면 오히려 반발력이 커져 서로를 밀어내게 될 수 있다는 뜻이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잎을 접는 미모사처럼, 우리 영혼도 때로는 섬세한 '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놀라운 것은 생명의 신비 속에서도 '간격'과 '기다림'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차 대전 중 박물관 화재의 열기 속에서 147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자귀나무 씨앗, 사해 근처 요새에서 2000년 만에 싹을 틔운 대추야자 씨앗처럼, 생명은 때로 오랜 '휴면'과 '거리'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에너지를 응축합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적절한 '틈' 속에서 생명은 스스로 싹 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죠.
마무리하며: 아름다운 간격을 위하여
사랑하기에 우리는 더 가까워지려 합니다. 하지만 칼릴 지브란의 지혜와 자연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간격'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서로의 고유함을 존중하고, 각자의 성장을 위한 햇살과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틈'. 그것이 관계를 더욱 풍성하고 오래도록 지속시키는 비결일지 모릅니다.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는 "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내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어쩌면 나무가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숲을 이루듯, 우리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서로에게 건강한 '틈'을 내어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당신의 소중한 관계 속 '아름다운 간격'을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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