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 우는 닭 얻고 키우던 닭을 잡다
(得早鳴鷄烹家中舊鷄)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
밤하늘 은하수로는 새벽 알기 어렵고
바람결 종루로도 시각 다 알 수 없어라.
베갯머리 근심 걱정 자꾸만 기어들어
내 가슴 시름으로 편치 못하더니
이불 끼고 뒤척이며 잠들지 못할 적에
꼬끼오 첫닭 소리 듣기에도 반갑구나.
* 성현(成俔, 1439~1504): 조선 초기 문신, 시인.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
조선 초기 문신이자 시인인 성현(成俔, 1439~1504)의 시 '일찍 우는 닭 얻고 키우던 닭을 잡다(得早鳴鷄烹家中舊鷄)'에 나오는 유쾌한 구절입니다. 오늘은 이 시를 통해 닭에 관한 옛 이야기들과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닭의 본분, 제때 울지 못하면 냄비행 🍲
성현은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 약전마을에 살았던 조선의 문신이었습니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그의 집 마당에도 닭이 있었을 테고, 이 시는 바로 그 일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시의 첫 구절은 무척 직설적입니다.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 시계가 없던 시절, 닭의 울음소리는 새벽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제 역할을 못하는 닭은 잡아먹고, 제때 우는 닭은 소중히 키운다니... 냉정하면서도 실용적인 농경사회의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쉽지 않았던 시간 확인의 문제 ⏰
다음 구절들은 당시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줍니다.
밤하늘 은하수로는 새벽 알기 어렵고
바람결 종루로도 시각 다 알 수 없어라.
별자리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흐린 날에는 불가능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종루의 종소리도 바람이 세게 불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새벽을 알리는 닭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면의 밤과 닭 울음소리의 위로 💤
시의 후반부는 밤잠을 설치는 시인의 모습을 그립니다.
베갯머리 근심 걱정 자꾸만 기어들어
내 가슴 시름으로 편치 못하더니
이불 끼고 뒤척이며 잠들지 못할 적에
꼬끼오 첫닭 소리 듣기에도 반갑구나.
근심과 걱정으로 뒤척이던 긴 밤, 드디어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는 시인에게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면증에 시달리다 마침내 알람 소리를 듣고 안도하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닭에 담긴 옛 이야기들: 의계와 목계 📚
닭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전해져 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남의 병아리를 정성껏 키운 의계(義鷄)
조선 중종 때 김정국의 《사제척언》에는 '의계(義鷄)'라 불리는 착한 암탉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미 닭이 죽고 나서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병아리들을 본 다른 암탉이 날개로 감싸 품어주었고, 덕분에 병아리들이 모두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 암탉은 하루도 빠짐없이 병아리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사람들은 이 암탉을 '의계'라 부르며 잡아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선행과 자비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비록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정신은 인간 사회에서도 중요한 덕목이지요.
이병철 회장이 늘 곁에 둔 목계(木鷄)
《장자》에 나오는 목계(木鷄, 나무로 깎아 만든 닭) 이야기는 또 다른 교훈을 줍니다. 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우는 과정에서, 완벽한 닭은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이는" 상태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상대 닭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있는 닭은 상대가 감히 덤비지 못하고 도망가게 만듭니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강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격렬한 반응이 아니라, 내면의 평정과 침착함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거실에 목계를 걸어놓고 늘 자신을 비춰보았다는 일화는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합니다.

닭의 다섯 가지 덕(五德)과 본분의 중요성 🏆
옛사람들은 닭에게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 문(文): 머리의 벼슬이 관을 닮아 문(文)의 덕
- 무(武): 발에 붙은 며느리발톱이 강해 무(武)의 덕
- 용(勇): 적을 만나면 용감히 싸워 용(勇)의 덕
- 인(仁): 먹을 것이 있으면 동료를 불러 같이 먹어 인(仁)의 덕
- 신(信): 정확히 새벽에 울어 신(信)의 덕
이렇게 많은 장점을 가진 닭이지만, 성현의 시가 말해주듯 가장 중요한 것은 제때 우는 본분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여러 덕을 갖췄다 해도 자신의 핵심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다는 실용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당신의 '울음소리'는 무엇인가? 🤔
성현의 시는 단순한 일상의 기록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각자의 '울음소리', 즉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본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의 일원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우리 각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성현의 시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결국 '냄비행'이 될 수도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실제로 잡아먹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도태되거나 소외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안한 밤을 이겨내는 '첫닭 소리'의 위로 🌄
성현의 시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닭 울음소리가 단순한 시간 알림을 넘어 정서적 위안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그 어둠을 깨고 들려오는 첫닭 소리는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우리 삶에도 이와 같은 '첫닭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희망의 신호, 긴 터널의 끝에서 보이는 작은 빛과 같은 것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런 신호에 귀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마치며: 시대를 초월한 삶의 지혜 📝
580여 년 전, 한 문신이 쓴 닭에 관한 시는 단순한 일상의 기록을 넘어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립니다. 각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교훈,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울지 못하는 놈 잡아먹고 잘 우는 놈 기르노니, 울기만 잘해도 속이 뻥 뚫리도다."
이 유쾌하면서도 냉정한 구절 속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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