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레퓌스의 벤치에서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 구상(具常, 1919~2004) : 시인, 언론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한국의 대표적 시인 구상(具常, 1919~2004)이 노년에 쓴 시 '드레퓌스의 벤치에서'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시는 영화 '빠삐용'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졌는데,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인간의 자유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화 '빠삐용'의 실제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를 통해 구상 시인이 던진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탈주범 '빠삐용', 그는 누구였나? 🔍
'빠삐용'(Papillon)은 프랑스어로 '나비'를 의미합니다. 주인공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ère)는 가슴에 나비 문신이 있어 이런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1973년 제작된 영화 '빠삐용'(스티브 매퀸 주연)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2017년에는 리메이크 버전도 제작되었죠.
실존 인물 앙리 샤리에르는 1931년 파리에서 악덕 포주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지만,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남미 기아나의 유형지로 보내졌습니다. 흔히 '악마의 섬'(le du Diable)이라 불리는 이곳은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감옥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9번의 탈출 시도와 마지막 성공 🌊
앙리 샤리에르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 그는 무려 9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감옥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첫 번째 탈옥에 성공한 그는 조각배로 약 2,900km를 항해해 정글 지대에 도착했고, 원주민들과 함께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추격자들에게 붙잡혀 5년 동안의 독방형을 선고받고 더욱 탈출이 어려운 악마섬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백발이 되고, 이가 다 빠지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묘사되듯, 그는 마침내 야자열매를 엮은 부대 자루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합니다. 당시 함께 탈출하자고 권유했던 동료 '드가'(실제로는 루이 드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섬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공적인 탈출 이후의 삶 💰
영화는 빠삐용의 탈출 장면에서 끝나지만, 실제 앙리 샤리에르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탈출 후 그는 베네수엘라에 정착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결국 식당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환갑이 넘은 1969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서전 '빠삐용'을 출간했고,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50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성공 덕분에 그는 197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았고, 1973년 영화가 개봉된 후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앙리 샤리에르는 1973년 7월 29일, 마드리드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일부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언으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이 본 '드가'의 선택과 자유의 의미 🤔
구상 시인의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는 영화 속 드가(더스틴 호프만 분)의 시선으로 빠삐용의 탈출을 바라보는 독백 형식의 시입니다. 제목의 '드레퓌스'는 19세기 말 반역죄에 몰려 악마섬에 갇혔다가 훗날 무죄가 입증된 유대계 프랑스 장교를 가리키며, '벤치'는 영화에서 빠삐용이 바다를 바라보던 벼랑 위 긴 의자를 의미합니다.
시에서 드가는 빠삐용과 함께 떠나지 않은 이유가 탈출 실패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라는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에 섬에 남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구절은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물리적인 탈출과 자유가 반드시 정신적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때로는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 수 있다는 역설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이 심오한 구절은 진정한 자유란 외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시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영토로 받아들이고 제약을 기회로 변화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죠.
두 가지 자유: 빠삐용과 드가의 선택 🔄
빠삐용과 드가는 자유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접근법을 보여줍니다.
빠삐용에게 자유란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9번이나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외부적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이었습니다.
반면 드가(시 속에서는 '짱')에게 자유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섬을 떠나는 것보다 자신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에서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내적 자유, 즉 외부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가짐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에 가깝습니다.

현대인에게 던지는 질문: 우리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
구상 시인의 시는 1973년 영화가 상영된 후 쓰였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제약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기기와 소셜 미디어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감옥'이 생겨난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가? 외부적 제약에서 벗어나는 빠삐용식 자유인가, 아니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적 평화를 찾는 드가식 자유인가?
삶의 고난과 제약 속에서도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구상 시인이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며: 파란만장한 한 인생의 교훈 🌟
앙리 샤리에르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단순한 탈옥 이야기를 넘어,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구상 시인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유의 더 깊은 의미, 즉 외적 자유와 내적 자유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빠삐용은 탈출에 성공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고, 드가(짱)는 섬에 남아 자신만의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자유로웠을까요? 정답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만의 '자유'를 어떻게 정의하고 추구하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구상 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이 깊은 통찰 앞에서, 우리 각자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
'읽을거리 > 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지 못하는 닭은 냄비로: 고전 시에 담긴 실용주의와 인생의 교훈 🐔 (25) | 2025.04.19 |
---|---|
현실과 환각 사이, 이민자의 불안한 일상 -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서평 📱 (21) | 2025.04.19 |
국화와 마주한 선비의 고뇌 - 이색의 '대국유감'에 담긴 절개와 비애 🍂 (165) | 2025.04.17 |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타 픽션의 향연 - 기욤 뮈소의 '인생은 소설이다' 서평 📚 (319) | 2025.04.14 |
시간을 넘어 전하는 마음의 편지 - 이꽃님의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서평 ✉️ (69) | 2025.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