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설악산과 차가운 겨울 바다, 그 속에서 교차하는 두 영혼의 이야기.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혼혈 작가가 그려낸 '속초에서의 겨울'은 쓸쓸함 속에 피어나는 감성의 세계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 프랑스어로 쓰여진 속초 이야기, 어떻게 유럽 문단을 사로잡았나?
2016년, 유럽 문단에 신선한 바람이 불었다. 24세의 신예 작가가 한국의 작은 해안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로베르트 발저 상, 프랑스 문필가협회 신인상, 레진 드포르주 상을 휩쓴 것이다. 주인공은 엘리자 수아 뒤사팽(Elisa Shua Dusapin, 엘리자 슈아 뒤사팽)과 그녀의 첫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Winter in Sokcho, 윈터 인 속초)』이다.
"프랑스어로 쓰인 한국 소설이라고? 그것도 속초가 배경이라고?"
처음 들으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이 '낯설음'에서 시작된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 서울, 스위스 포랑트뤼를 오가며 자란 뒤사팽은 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통해 독특한 시선으로 한국의 겨울 바다를 그려냈다.
🧩 '어디에서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작가의 정체성
뒤사팽의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독특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13세 때 어머니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 안의 두 문화가 조화로운 결합이 아닌 "단 하나의 영토에서 살려고 애쓰는 두 개의 개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아시아인, 아시아에서는 서양인."
어디에 있든 자신의 일부는 늘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있는 경험은 뒤사팽에게 글쓰기라는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녀에게 글쓰기는 "현실에서 찾아내지 못한 거처를 창조해내는 방법"이었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그녀는 "일상을 통해 알고 싶었던 만큼 한국을 속속들이 아는 젊은 여인"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소설이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점이다. 어릴 때 사용하던 한글을 잊어버린 뒤사팽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겨울 풍경을 그려냈고, 그 섬세한 묘사는 유럽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엄마의 나라에서 찾은 소재로 작가로서의 발판을 다진 셈이다. (한국어를 잃어버렸다는 게 약간 마음 아프면서도, 그래서 더 특별한 시선이 탄생한 것 같기도 하고... 😌)
💭 소설 속으로: 속초 펜션에서 만난 두 영혼의 침묵의 대화
소설의 주인공은 속초의 한 펜션에서 일하는 20대 혼혈 여성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속초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일찍 그녀의 곁을 떠났다. 복어 손질의 대가인 억척스러운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녀의 일상은 겨울 속초만큼이나 쓸쓸하다.
"겨울에는 그다지 볼거리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속초."
모델이 되기 위해 서울을 오가던 애인마저 그녀를 떠나버린 상황에서, 펜션에서 식사 준비와 세탁, 청소를 하며 지내는 일상은 젊은 여성에게 따분하고 힘겹기만 하다.
그런 어느 날, 노르망디 출신의 중년 프랑스 만화가 얀 케랑이 펜션에 투숙한다. 영어로 "며칠 묵어 갈 수 있냐"고 묻는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관심은 자신도 모르게 이 낯선 외국인에게로 향한다. 누구를 떠올렸을까? 떠나버린 아버지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까?
🎨 완성되지 못한 그림들, 완성되지 못한 관계
소설은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요리를 하다 손을 베어 피 흘리는 주인공을 본 후, 케랑은 단 한 번도 식사하러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히 바닷가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주인공은 한국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으며, 케랑은 노르망디 출신의 만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DMZ와 설악산을 함께 다녀온 후, 주인공은 끊임없이 케랑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그의 방을 청소하며 그가 그리는, 완성되지 못한 여자들의 그림을 훔쳐보기도 한다. 그림과 씨름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 떠도는 케랑과, 아버지도 남자친구도 다 떠나고 없는 속초에 속절없이 머무는 주인공.
두 운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독자는 아련함과 속절없음에 젖어든다. 마치 겨울 바다의 차가운 공기처럼 스며드는 그 감정은 소설의 매 페이지를 적신다. (겨울 바닷가를 혼자 걷는 기분이란... 아시는 분들은 아시죠? 🌬️)
📖 간결한 문장 속에 숨겨진 깊은 감성
『속초에서의 겨울』의 매력은 간결한 문체 속에 깃든 풍부한 감성이다. 뒤사팽은 불필요한 수식 없이 속초의 겨울 풍경과 인물의 심리를 담백하게 그려낸다. 그럼에도 그 문장 사이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며있다.
주인공은 곧 떠날 케랑을 위해 위험한 복어 손질에 도전하고 성공한다. 그러나 케랑은 끝내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떠나버린다. 선 두 개와 발자국, 그리고 화첩만 남긴 채.
이 결말은 마치 속초의 겨울 바다처럼 쓸쓸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명확한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오히려 독자에게 더 많은 생각의 공간을 열어준다.
"외로움과 고독으로 점철된 겨울 속초, 프랑스를 책으로 익히고 프랑스 말을 배우는 화자의 공허함, 예술을 위해 떠도는 프랑스 중년 남자의 그림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속초에서의 겨울』은 말보다 침묵이, 행동보다 정적이 더 많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침묵과 정적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치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종종 말없이 이루어지잖아요... 음, 갑자기 좀 무거워졌네요! 😅)
🤔 『속초에서의 겨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잔잔하게 흐르다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마치 겨울이 지나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인생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나는 어디에 속해 있나?
뒤사팽이 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통해 던지는 이 질문들은 사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들이다.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작가의 자전적 상상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방황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때로는 상처받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겨울 속초의 차가운 바다와 설악산의 눈 덮인 풍경 속에서, 뒤사팽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인간의 따뜻함을 동시에 그려냈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유럽 문단을 사로잡은 이유일 것이다.
프랑스어로 쓰였지만 한국의 정서를 품은,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 소설. 당신도 한번 속초의 겨울 바다를 거닐어보는 건 어떨까? 물론, 책장을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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