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유감(對菊有感) 1
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 같은지
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
* 이색(李穡, 1328~1396): 고려 말 문신.
가을이 깊어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국화의 향기, 그리고 고려 말 혼란기를 살았던 한 선비의 마음이 담긴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대국유감(對菊有感)'은 단 네 구절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절개의 상징, 국화를 마주한 선비 🌼
국화는 여러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이 아닌, 차가운 서리를 맞으면서도 홀로 피어나는 가을 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서릿발이 날리는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고고한 품성 때문이지요.
특히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은 국화를 무척 사랑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북송의 주돈이(周敦頤)도 자신의 '애련설(愛蓮說)'에서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菊花之隱逸者也)"라며 "진나라 도연명이 국화를 사랑했는데 이후 그런 사람이 드물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국화와 도연명의 인연은 각별했습니다.
도연명은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향리의 어린 것들에게 허리를 굽히랴"라는 명언을 남기고 벼슬을 버린 후,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시 '음주(飮酒) 5'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採菊東籬下)
멀거니 남산을 바라보네 (悠然見南山)
이 구절은 세속의 욕망과 명리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은자의 평화로운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이색은 바로 이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시 '대국유감'을 지었을 것입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이색의 고뇌 🌊
이색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즉 고려 말과 조선 초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한 인물입니다. 그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역 행위로 판단했고,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돌릴 힘은 없었지요.
결국 그는 신군부 세력(이성계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여러 번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거절한 절개의 인물이었습니다.
'송와잡설'에 따르면, 이 시는 군부에 의해 폐위된 우왕이 강화에 있을 때 이색이 남루한 차림으로 찾아갔다가 국화를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시의 마지막 구절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에 담긴 슬픔과 분노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 - 한 구절에 담긴 비애 💔
서애 류성룡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이색의 속마음이 다 담겨 있다고 극찬하며 "참으로 슬프다"고 토로했습니다. 시류에 영합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절개를 지키려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끄러워하는 그 비애를 제대로 읽어낸 것입니다.
여기서 '진짜 국화'는 절개를 지키는 이색 자신과 폐위된 우왕을, '가짜 연명'은 권력을 찬탈한 이성계와 그 무리를 암시합니다. 고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진짜'와 그것을 뒤엎으려는 '가짜'의 대비를 통해, 이색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도연명이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멀거니 남산을 바라보네"라고 읊은 구절을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라고 되받은 이색의 시적 대응은 실로 압권입니다. 도연명이 세상일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은거의 삶을 노래했다면, 이색은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거취를 고민하던 이색과 길재의 대화 🍃
'월정만필'에는 이색이 제자 길재(吉再)로부터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려 할 때, 길재가 스승 이색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이색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대신이라 나라의 운명과 함께해야 하니 떠날 수 없지만, 그대는 떠나가도 좋다."
결국 길재는 스승의 말대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하였고, 이색은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 숱한 유배와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국유감'에 담긴 이색의 마음은 더욱 비장하게 다가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대국유감'이 던지는 질문 🤔
이색의 시는 단순히 역사 속 한 인물의 고뇌를 담은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타협하고 순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신을 지키며 맞서야 하는가?
이색은 절개를 지키려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충분치 못하다고 느끼며 부끄러워했습니다. 이런 양가적 감정은 어쩌면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고민일지도 모릅니다.
가을이 깊어가며 국화가 만개하는 계절, 우리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색의 '대국유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네 구절 속에 담긴 깊은 고뇌와 결연한 절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울림을 줄 것입니다.
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 같은지
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니.
가을 국화를 마주할 때마다, 한 선비의 절개와 비애를 기억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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