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따뜻한 가족애와 냇물에 비친 자화상 👨‍👨‍👦

 

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쳐다봤지.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

* 박지원(1737~1805) : 『열하일기』 저자.

 

 

추모시라고 하면 보통 무거운 분위기와 슬픔이 가득한 내용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형을 추모하며 쓴 시 '연암에서 형님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는 조금 다릅니다. 슬픔 속에서도 따뜻한 추억과 해학, 그리고 가족의 닮은 모습을 떠올리는 잔잔한 유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잃은 연암의 1787년, 슬픔의 연속 📅

1787년, 51세의 박지원에게 이 해는 큰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1월에 동갑내기 부인을 잃고, 맏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 7월에는 일곱 살 위인 형 박희원(朴喜源)까지 잃었습니다. 형님의 죽음은 연암에게 특히 큰 상실이었습니다.

연암은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형을 무척 따랐습니다. 가족애가 얼마나 깊었는지, 형에게 자식이 없자 첫째 아들을 양자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1767년 서른한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유산을 가난한 형에게 몰아주고 서대문 밖으로 집을 옮겼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정조 즉위 직후 세도가 홍국영의 표적이 되어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로 피신할 때도 형님 식구들을 함께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의 호 '연암'은 바로 이 골짜기 이름에서 따온 것이지요.

연암 박지원

"닮은꼴 붕어빵 가족" 연암의 외모는 어땠을까? 🖼️

추모시에서 연암은 형님의 얼굴과 수염이 아버지를 닮았고, 자신은 그 형님을 쏙 빼닮았다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연암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過庭錄)'에 따르면, 연암은:

•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고
• 얼굴은 긴 편이며
• 안색이 붉고
• 광대뼈가 불거져 나왔으며
•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습니다

이 묘사는 현존하는 그의 초상화와 거의 일치하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꽤 인상적인 외모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와 형도 비슷한 외모였을 것이고, 이들의 '가족 닮음'이 연암의 추모시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연암 박지원

해학과 감성이 공존하는 연암의 문학 세계 📚

연암의 제자 이덕무(1741~1793)는 이 추모시를 읽고 "정이 지극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니 정말 진실되고 절절하다"고 평했습니다. 이덕무가 연암의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가 두 번째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눈물겨웠던 시는 큰누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쓴 '누님을 보내며'였습니다. 이 시는 "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네"로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시집가는 누나가 미워 화장품에 먹물을 섞어놨던 장난기 어린 추억까지 언급하며, 연암은 슬픔과 해학이 공존하는 '눈물 웃음'의 세계를 창조해냅니다.

이처럼 연암의 글에는 단순한 슬픔이나 기쁨에 그치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문학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요?

냇물에 비친 자화상, 그 선한 마음 💧

추모시의 마지막 구절, "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에는 연암의 선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형님이 그리운데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형님을 닮았으니 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형님을 볼 수 있겠다는 발상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공감되는 경험입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부모님이나 형제의 모습이 비친 듯한 느낌을 받은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테니까요. 벗겨진 이마, 늘어나는 주름, 희끗거리는 새치... 이런 모습들이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친척의 모습과 겹쳐 보일 때 느끼는 그 복잡한 감정을.

거울 대신 자연의 냇물에 자신을 비춰보고자 했던 연암의 마음. 그 소박하고 순수한 발상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만듭니다.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열하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연암은 신분제도와 양반 중심 사회를 비판하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강조했던 개혁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문학 세계는 풍자와 해학이 넘쳤으며, 「허생전」, 「양반전」 등의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 드린 시처럼,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 또한 그의 중요한 면모였습니다.

글로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했던 냉철한 지식인이면서도, 가족을 깊이 사랑하고 추억하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 바로 이런 다면적 인간성이 연암 박지원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냇물 속 자화상' 🌊

연암이 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형님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종종 거울이나 사진 속에서 가족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전적 닮음을 넘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징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 카메라나 셀카봉으로 수시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연암은 냇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형님을 그리워했습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연암의 시 한 편을 통해, 우리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이 느꼈던 가족애와 그리움이 오늘날 우리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대와 환경은 변해도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은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오늘 문득 거울을 볼 때, 혹시 그 안에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면, 연암의 마음을 한번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의관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네" - 그 선한 마음이 우리의 일상에도 잔잔한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