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면,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만나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1903~1950) : 시인, 본명은 윤식(允植).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시인 김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담긴 첫 문장입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모란처럼,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영랑의 시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가 노래한 '찬란한 슬픔의 봄'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요? 강진의 모란과 김영랑, 그리고 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강진 거리에 피어난 '영랑의 흔적' 🏡

전남 강진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모란'과 '영랑'이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란공원, 모란상회, 모란미용실부터 영랑사진관, 영랑다방, 영랑화랑까지... 심지어 컴퓨터 가게 간판에도 시인의 이름이 붙어 있죠. 이는 강진이 얼마나 김영랑 시인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보여줍니다.

군청 옆길로 걸어 올라가면 고즈넉한 초가집이 나타납니다. 바로 김영랑의 생가입니다. 안채에 딸린 마당과 정겨운 장독대, 그리고 해마다 봄이면 마당 한구석에 피어나는 모란까지. 진한 모란 향기가 시비(詩碑)를 감싸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생가의 툇마루에 앉아 그의 시집을 펼쳐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입니다.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낙화한 뒤의 절망감을 반복적인 리듬으로 노래한 이 시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요?

'찬란한 슬픔'의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영랑의 '찬란한 슬픔'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최고의 무용가로 이름을 날린 최승희입니다.

김영랑은 14세에 일찍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상처(喪妻)하고, 서울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을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작가 최승일을 사귀게 되었고,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에도 서울에 갈 때마다 최승일의 집에 묵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여동생 최승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2학년으로 14세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미모와 함께 내면도 꽤 성숙했던 모양입니다. 22세였던 영랑의 시적인 감수성에 최승희의 마음도 흔들렸고, 둘의 관계는 마침내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두 집안의 반대와 비극적 선택 🌧️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하지만 사랑에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두 집안 모두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죠.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승희의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1년간의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상심한 영랑은 생가 뒤란 대나무숲 동백나무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지금도 영랑 생가에 가면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그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슬픔을 시로 승화시킨 영랑의 5월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 사랑을 뒤로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습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것이죠.

영랑은 모란이 피는 5월이면 좋아하는 술도 끊고 노래도 멀리하면서 모란 곁을 서성거렸다고 합니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그 진한 향기만큼 깊은 슬픔을 혼자 견디는 모습이 얼마나 애잔했을까요? 그는 집 뜰에 300여 그루의 모란을 심어 정성껏 가꾸었다고 합니다.

순수시의 시대를 연 영랑의 삶과 마지막 🌹

1930년, 영랑은 박용철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하면서 순수시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20여 년간 향토적이고 미학적인 시를 잇달아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에 맞아 4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남긴 시적 유산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모란

오늘도 영랑을 기다리는 강진의 모란 🌸

지금도 모란이 필 무렵이면 영랑의 생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지난가을에는 마당가 장독대 앞에서 '오-매 단풍 들것네'를 읊조리며 시향(詩香)에 젖었던 독자들도 있었겠지요.

올해는 어떨까요? 최승희와의 안타까운 사연을 되새기며 젊은 날의 영랑을 떠올리는 사람들, 그 속에서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자화상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영랑의 시는 단순한 자연 찬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아픔, 기다림의 설렘, 그리고 상실의 슬픔이 뒤섞인 인생의 노래입니다. 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지는 사랑의 모습을 모란에 빗대어 표현한 영랑의 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란이 피는 5월, 강진을 찾아 영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진한 모란 향기 속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