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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가 보지 못한 일본의 변신: 쇄국 뒤에 숨겨진 200년간의 해양 강국화 프로젝트

by 남조선 유랑민 202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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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가 보지 못한 일본의 변신: 쇄국 뒤에 숨겨진 200년간의 해양 강국화 프로젝트

 


🌊 표면적 쇄국 뒤에 숨은 일본의 전략적 해양 정책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은 일본에 아홉 차례나 통신사를 파견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무엇을 했을까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자부하며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당시 '왜인'이라 경멸하던 일본은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통신사들이 오고간 200년 동안 일본은 세계적 해양 강국으로 변신했고, 그 과정에서 오사카는 인구 40만 명의 경제 수도로, 에도(현 도쿄)는 인구 100만 명의 정치 수도로 성장했습니다. 반면 한양의 인구는 20세기 초에도 2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조선통신사가 보지 못한(혹은 보려 하지 않은) 일본의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세계가 해양의 시대로 변모했으며 해양력 강화는 국가의 부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 - 에도 막부의 인식

통신사

📈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오사카와 에도, 그 놀라운 발전상

조선 사신들도 감탄한 '계획된 도시 인프라'

조선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 도시의 발전상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특히 오사카는 인구 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도로는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습니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 있고, 수많은 선박이 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숫돌처럼 반반한 도로라니... 마치 오늘날 아스팔트 도로를 미리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당시 한양 거리가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고, 마른 날에는 먼지가 날리던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실감납니다." 🛣️

또한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까지, 조선 사신들은 일본의 생활 문화에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도시 계획과 위생 관념은 이미 당시 일본이 근대적 도시 개념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에도, 어촌에서 세계 최대 도시로

에도(현재의 도쿄)는 더욱 놀라운 사례입니다. 원래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이었던 이곳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을 고려해 해양도시로 건설했습니다. 그 결과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 각종 인프라가 구축되고, 인구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100만 명이면 당시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우리의 수도 한양은 20세기 초에도 25만 명 정도였으니, 단순 숫자만으로도 4배 차이가 나는 셈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과 뉴욕의 차이 정도라고 상상해볼 수 있겠네요." 🏙️

통신사

🚢 해양 강국의 비밀: 막부의 전략적 쇄국

쇄국 정책의 이면에 숨은 실용주의

일본과 조선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쇄국정책을 폈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달랐습니다. 조선이 성리학적 이데올로기 고수와 해양 세력의 성장 억제를 위해 철저한 쇄국을 시행한 반면, 일본의 에도 막부는 실용적으로 정책을 운영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나가사키만에 만든 '데지마(出島)'입니다. 육지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이 사다리꼴 모양의 인공섬을 통해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와의 무역을 지속했고, 이를 통해 천문학, 지리학, 화학, 토목술, 조선술, 항해술, 무기 제조 등 서양의 발전된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쇄국이라는 껍데기 안에 국제화라는 속살을 채운 셈입니다. 마치 오늘날 북한이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으면서도 특정 경제구역에서는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 것과 비슷한 이중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그 규모와 진정성은 비교할 수 없지만요." 🌏

'주인장(朱印狀)'으로 보호받은 해외 무역

더 놀라운 사실은 일본 막부가 특정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이라는 증서를 발부했다는 점입니다.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 배를 기반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과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해 만든 선박으로, 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에 활용되었습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 가토오 기요마사는 1604년에 이미 약 550톤급의 주인선을 건조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영국형 범선을 건조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우리 배는 어땠을까요?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은 약 100~150톤급 정도였으니, 단순 비교하면 일본 주인선은 우리 배의 3~5배 규모였던 셈입니다. 우리가 육지에서 농사짓고 성리학 공부하는 동안, 그들은 바다에서 세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

에도 시대

🌍 세계로 향한 일본의 발걸음: 로마 파견 사절단

태평양을 건너 로마까지 간 하세쿠라 사절단

쇄국 정책 하에서도 일본은 1613년 9월 15일, 180여 명으로 구성된 유럽 파견 사절단을 로마로 보냈습니다. 센다이번의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이끈 이 사절단은 에스파냐의 지도를 받아 건조된 갤리온선인 '산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를 경유해 에스파냐에 도착했고, 1615년 1월 2일에는 국왕 펠리페 3세를, 같은 해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습니다.

비록 통상 교섭에 성공하지 못하고 7년 후인 1620년 8월에 귀국했을 때는 이미 막부가 기독교 금지령과 대형 함선 제조 금지령, 해외 도항 금지령을 내린 상태였지만, 이 사절단의 경험은 일본인들이 인식을 바꾸고 세계를 수용할 준비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조선통신사보다 20여 년 앞서 일본은 이미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그것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유럽 본토까지요. 조선통신사가 일본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왕복한 여정이 대단하지만, 하세쿠라 사절단의 여정은 그야말로 지구를 반 바퀴 돈 셈입니다." 🌎

에도시대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알았던 막부

현명한 일본 막부는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에서 무역하도록 허락하면서도 조건을 달았습니다. 입항할 때마다 반드시 해외의 '떠도는 소문'(실은 정보)을 수집한 보고서를 나가사키 행정당국에 제출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정보 보고서와 유사한 기능을 했습니다.

"안보와 정보의 가치를 안 것이죠. 오늘날로 치면 군사위성과 정보기관을 운영하는 것과 비슷한 발상입니다. 나라 문을 닫되, 세계의 동향은 놓치지 않겠다는 치밀한 전략이었습니다." 🔍

일본 도자기

🏺 세계로 뻗어나간 일본 문화: 도자기와 부세화

조선 도공들이 세계화시킨 일본 도자기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품 중 하나는 도자기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이 빚은 도자기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나 '이마리항'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특히 조선 도공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어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1650년부터 1세기 동안 유럽으로 운반한 도자기는 무려 520만 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천시했던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수출산업을 이끈 주역이 됐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오늘날 '한류'의 첫 번째 주인공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들이 수출한 문화상품은 'Made in Japan' 라벨이 붙었을 뿐이죠." 🥣

유럽 인상파에 영향 준 일본 미술

도자기와 함께 전파된 일본의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네, 마네, 고흐 등 유명 화가들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자신들의 작품에 많이 반영했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 일본 부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미술사에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 예술의 혁명을 이끌어낸 멋진 사례죠. 조선의 문인들이 일본 문화를 '야만적'이라 무시했을 때, 이미 그 문화는 세계 예술사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

일본 지도

🐟 들어오면서 나가는 법을 배운 일본의 해양 무역

전 동아시아를 아우른 일본의 무역망

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을 파견했습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 서양식을 모방해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습니다.

특히 고래잡이, 즉 포경업은 통신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조선도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했지만, 이 무렵 일본은 개량된 작살 등을 사용해 산업 단계로 성숙시켰습니다. 이러한 발달한 포경 기술 덕분에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와 독도로까지 출어했고, 이를, 명분으로 지금까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우기는 근거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우리가 쇄국하고 바다를 등지는 동안, 그들은 우리 영해까지 들어와 고래를 잡고 있었던 거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바다를 포기한 민족에게 섬은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북태평양 너머까지 뻗은 일본의 선박들

일본은 북쪽 아키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오사카와 에도까지 오가며 상업을 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들이 태평양으로 조업을 나가 17~18세기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 일본 선박들이 표착하는 사례들이 보고되었다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배를 만들고 운항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의 작은 배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이미 그 배들의 후손은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던 거죠." 🚢

🧠 조선과 일본, 다른 선택의 결과

성리학과 실용주의의 대결

일본 막부는 세계가 해양의 시대로 변모했으며 해양력 강화가 국가의 부강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학습했습니다. 반면 두 번의 참혹한 전화(임진왜란과 병자호란)를 겪고 난 뒤에도 조선의 통신사들은 세계 정세는커녕 일본이 개량된 배로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며 무역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마음 아픕니다. 조선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명분과 위계를 중시하며 '대국(명·청) - 중국(조선) - 소국(일본)'이라는 국제질서를 고수했지만, 현실은 이미 그런 질서가 붕괴된 지 오래였습니다. 머리는 과거를 향하고, 발걸음은 제자리인데, 세계는 미래로 달려가고 있었던 거죠." 📚

독특한 세계관을 고수한 성리학자들의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분열된 채 명분과 이념을 표방하며 권력투쟁을 벌이다 연달아 전쟁의 참화를 겪어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고도 다시 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벌이면서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역사의 쓸쓸한 복수

통신사 파견이 끊어진 얼마 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75년 운양호를 필두로 세 척의 일본 군함을 끌고 왔고, 조선 정부는 저항 한번 못한 채 또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경멸하던 '왜놈'들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교훈입니다. 상대를 알지 못하고, 세계의 변화에 눈감은 채 자신의 우월함만 믿었던 조선은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적어도 세계를 직시하고, 변화에 적응하며, 실용적인 판단을 내리는 지혜는 필수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 과거의 교훈, 현재의 선택

조선통신사와 일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국제 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세계화와 자국 정체성 보존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 것인가?

일본은 겉으로는 쇄국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세계와 소통하는 실용적 접근으로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진짜' 쇄국을 선택하고 성리학적 가치관에 매몰되어 변화하는 세계를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때로 한 세대가 아닌, 몇 세대에 걸쳐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선통신사와 일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패자의 이야기에서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보지 못한' 일본의 변화와 성장은, 결국 조선이 '보려 하지 않았던' 세계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리고 미래의 역사가들은 현재 우리의 선택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바다를 향한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선택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바다를 향해 배를 띄우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나침반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요? 그 답은 우리 각자가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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