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수호조약과 조선의 강제 개항: 변화의 바람이 불다
1876년, 조선은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이끄는 신정부는 일본과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1811년 통신사가 끊어진 뒤 65년 만에 이루어진 일로, 전통적인 교린 외교가 아닌 근대적 의미의 외교가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총 12조로 구성된 불평등조약이었습니다. 특히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원산, 인천)를 20개월 내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선택한 항구들은 단순한 경제적 이유를 넘어 전략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 인천: 청나라를 의식한 곳으로, 한양으로 침투하는 최단 거리
- 원산: 동해 진출에 적합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에 유리한 위치
더불어 제7조를 통해 일본은 조선 연안을 측심하고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 군사작전과 상륙 지점 선정에 유리한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이러한 조약 내용은 일본이 단순한 통상 관계를 넘어 장기적인 조선 지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조약의 두 얼굴: 불평등과 자주의 양면성
병자수호조약은 분명 불평등했지만, 제1조인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500년 가까이 중국 중심의 조공과 책봉체제에 묶인 조선이 중화적 질서를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도 비슷한 개항 압력을 서양 열강들로부터 받았지만, 이에 효율적으로 적응하여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왜 실패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 조선 사회의 반응과 대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개항 이후 조선 사회의 세 가지 흐름
조약 체결 이후, 불안과 충격, 혼란에 휩싸인 조선 사회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대응했습니다:
1.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는 유림들
수적으로 우세했던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이자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이들은 명성황후 세력에 저항하며 조약을 극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최익현은 '지부복궐상소'(도끼를 옆에 차고 대궐 앞에 엎드려 올리는 상소)를 할 정도로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후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세력으로 발전하며, 현대사에서는 저항적인 애국자, 민족주의자로 평가받습니다.
2. 자생적인 개화주의자들과 신진 세력
훗날 갑신정변을 이끌게 될 서광범, 박영효, 김옥균, 김홍집 등 젊은 청년들은, 북학의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었습니다. 지도자였던 오경석, 유대치 등은 역관 출신이었고, 정신적 지주인 박규수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의 손자였습니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정책 차이로 인해 사대당(수구당)인 온건 개혁파와 독립당(개화당)인 급진 개혁파로 분리되었고, 각각 청나라와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했고, 후세까지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회적·경제적 기득권층이면서도 개혁과 정의, 애국을 추구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3. 일반 백성들
신분적 제약과 경제적 빈곤으로 교육과 견문의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유교 정치의 영향으로 충·효·공동체 의식이 강했지만, 국가의식은 미약했고 개혁과 개방에 미온적이었습니다. 이들이 비판의식과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사회개혁에 동참하는 '민중'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혁 정책: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은 대원군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 수신사와 시찰단 파견
- 1876년: 1차 수신사 김기수 파견, 일본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고 <일동기유>를 써서 정부에 보고
- 1880년 6월: 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 파견
- 1881년 4월: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 비밀리에 일본 파견, 62명이 74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며 각 분야 조사 후 100여 책의 보고서 제출
- 1881년 9월: '영선사'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유학생을 청나라에 파견, 군사 기술과 외국어 학습
2. 정부 조직과 군사 개혁
-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 설치, 외교·내정·군정 등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
- 1881년 5월: 장교를 양성하는 신식 군대 '별기군' 창설
3. 외교 정책 추진
- 자주외교를 표방하면서 청나라에는 책봉 체제를 없애고 근대조약 체결 요구
- 일본에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 조항 개정 제안
- 미국을 비롯한 서양과 국교 수립 추진
-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을 개혁과 외교정책의 모델로 채택
<조선책략>은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일본에서 만난 김홍집과 조선의 현실을 논하며 작성한 것으로, '친(親)청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이라는 정책 구도를 제안했습니다.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해 삼국(조선, 청, 일본)이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고, 미국의 역할을 활용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 개혁의 저항과 임오군란의 발발
개혁 정책은 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유림과 보수세력은 '위정척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운동과 사상투쟁을 벌였고, 영남의 유생들은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궁궐 앞에서 집단 상소(만인소)를 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상대적으로 덜 불평등했으며, 관세제도 도입 등 근대화에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고, 근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생했습니다. 개혁 정부가 별기군을 운영하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의 예산을 빼서 투입했고, 1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한 구식 군인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공권력에 도전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한 소요였으나, 대원군 등의 책략과 보수세력의 지원으로 군사 쿠데타로 변질되었습니다. 일본 공사관이 방화되고, 교관을 비롯한 일본 경찰이 살해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대원군은 반일 감정을 부추기며 명성황후와 개혁세력 살해를 시도했으나, 명성황후는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하자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이끌고 와서 대원군을 체포한 뒤 청나라로 압송했습니다.
📜 임오군란의 결과: 개혁의 좌절과 외세 개입의 심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받았으며, 조선이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표현이 조약 전문에 포함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외교적 사항은 자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3000명의 주둔군으로 조정을 압박했습니다.
일본도 임오군란의 피해를 빌미로 제물포 조약을 맺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의 역학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어 조선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개혁을 좌절시켰습니다. 또한 후에 청·일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개혁세력을 사대당과 독립당으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결론: 실패한 개혁, 그러나 남긴 교훈
개항에서 임오군란까지의 시기는 조선이 근대 국가로 변모하려 했던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비록 외세의 개입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이 시기의 경험은 후대의 개혁과 독립 운동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혁 노력, 개화파의 이상과 좌절, 보수 세력의 저항,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동향은 모두 한국 근대사의 복잡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외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시기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를 넘어,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가의 주권과 발전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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