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점과 조선왕조 518년 역사의 종말을 목격한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
명성황후와 고종 사이에서 태어난 귀한 적장자 👶
1874년 3월 25일(음력 고종 11년 2월 8일),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난 순종(純宗, 휘는 척(坧), 자는 군방(君邦))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왕자녀들 중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한 자식이었고, 고종의 수많은 자녀들 중에서도 유일한 정실 소생의 적자였습니다. 1875년 불과 2살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의 생일인 3월 25일은 후에 대한제국 시기에 '건원절(乾元節)'이라는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헌종 이후 조선왕조는 약 40여 년간 방계 혈통과 후궁 소생의 왕들이 왕위를 이어왔기에, 순종은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로서 대한제국 황실의 금지옥엽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천연두를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아들의 건강을 위해 무속에 기대어 국가 예산을 낭비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독살 미수 사건과 건강의 악화 💊
순종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결정적인 사건은 1898년에 발생한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이었습니다.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고종과 순종이 함께 커피를 마시는 때를 노려 커피에 아편을 타서 올렸습니다. 커피 애호가였던 고종은 맛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바로 뱉었지만, 순종은 무심코 다량을 복용하는 바람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순종은 며칠 동안 혈변을 누는 등 건강을 크게 해쳤고, 젊은 나이에 치아 상당수가 빠져 틀니를 끼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가 빠져 틀니를 낀 탓에 하관이 커져 어벙해 보이게 되었으며 말도 어눌해져,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순종의 입지는 크게 약해졌고, 고종 사후에는 복벽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순종이 성불구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가까이에서 모시던 궁녀와 내관들은 정상이었다는 증언을 남겼습니다. 분명한 것은 순종에게는 슬하에 직계 자손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순종 본인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었던 듯, 순정효황후 윤씨와의 재혼 당시 상궁에게 "내가 결혼해서 무슨 소용인가? 이곳에서 6년 이상 지내지 못할 텐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제에 의한 강제 즉위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것이 일본에 발각되자, 이에 분노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습니다. 결국 고종은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攝政)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는데, 일본은 이를 이용해 순종의 즉위식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양위식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신원 불명의 두 사람(아마도 내관으로 추정)이 이들의 대역을 맡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고종은 '대리(代理)'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제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순종 역시 이런 고종의 의중을 이해하고 대리청정 조칙을 취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명목상의 권력과 실권의 상실
순종의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넘어갔습니다. 또한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서울에서는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순종은 외교, 내무, 군사권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군대 없는' 총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순종은 즉위하던 해에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이복동생 영친왕 은(垠)을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하들은 이복동생이므로 '황태제(皇太弟)'로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순종은 정종이 동생 태종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은 전례를 들어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얼마 뒤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 명목으로 끌려갔고, 훗날 일본 황족인 마사코 여왕(이방자)과 정략결혼하게 됩니다.
국권 상실과 경술국치의 비극 🌑
실권이 없는 황제로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권신 송병준, 일본의 압력 속에 무력하게 국권을 하나둘씩 일본에 넘겨주었습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습니다:
"짐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했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그러나 원래 한일 합방 조약 각서에는 일본 덴노와 순종이 서명과 어새의 날인이 필요한 '조칙'을 내리기로 했음에도, 정작 어새만 찍힌 '칙유'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순종이 서명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정확히는 조약서에 국새를 찍었으나 조칙에는 찍지 않아 효력이 없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고 강제 합병을 진행했습니다.
이왕(李王)으로 살아가는 비운의 세월 👴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후 순종은 조선 왕공족으로서 일본 황족보다 낮고 일본 귀족인 화족 계층보다는 높은 '이왕(李王)' 직위를 받게 됩니다. 그의 거처인 창덕궁은 일본식으로 '쇼토쿠큐(昌德宮) 이왕'이라 불렸습니다.
나라를 잃은 후 순종은 주로 창덕궁에 머물면서 당구를 치는 것으로 소일했으나, 한번은 당구를 치다 쓰러진 후로는 그마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종의 장례식에서는 양복이나 일본 옷을 입은 문상객에게 등을 돌리고 절을 받지 않아 일본인 고관들까지 한복을 구해 입고 문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1917년 6월에는 일본에 방문해 다이쇼 덴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완용이 창덕궁을 일본 황실의 별궁으로 삼고 종묘를 공원화하자는 주장을 조선총독에게 강하게 어필했을 때, 평소 이완용을 싫어하던 순종은 사람들 앞에서 이완용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완용의 이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라 일제조차 거부했습니다.
최초의 궁궐 개방과 근대적 변화 🏛️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종은 궁궐을 최초로 개방한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강요가 컸지만 순종 본인의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경궁과 그곳에 보관된 황실 유물들을 일반에 공개했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09년 창경원 개원식에 순종은 모닝코트와 중절모에 구두를 신고 지팡이까지 짚는 등 말끔한 양복을 입고 참석했습니다. 순종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 창경원이 폐쇄되었는데, 이는 순종이 직접 창경원에서 산책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서거와 조선왕조의 종말 🕯️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52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했습니다. 죽기 직전 일본군 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유릉(裕陵)에 안장되었으며, 이 능에는 순종과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 민씨, 두 번째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모두 합장되어 있어 조선왕조의 능제 중 유일한 3인 합장릉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순종의 장례는 한일병합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적 행사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의 27대, 518년에 걸친 조선왕조의 역사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유조(遺詔)의 진실
순종이 사망 전에 남긴 유조(유언)에는 "한일병합 조약의 조인이 일본 및 친일 관료의 강압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순종 본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유조는 궁내부 관리 조정구에게 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한인 신문 《신한민보》에 실렸습니다.
유조의 일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박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순종의 인간적 면모와 취미 🎱
마지막으로 순종을 모신 궁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채로운 식사를 즐긴 아버지 고종과 달리 순종은 좋아하는 음식이 딱히 없었으며, 수라를 올려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물에 밥 만 것만 겨우 먹어 수라간의 나인들이 늘 걱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치아가 부실해 딱딱한 것을 먹기 어려웠기 때문에 깍두기도 삶은 무로 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국호텔의 초대 요리장 요시카와 가네키치와 그의 아들이 만든 프랑스 요리는 유독 좋아하여 매일 먹었다고 합니다.
지독한 근시였던 순종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는 당시 조선의 예법에서 윗사람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이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세자 시절부터 신문물에 관심이 많아 세창양행을 통해 시계 등 여러 물건을 수집했는데, 특히 그의 바쉐론 콘스탄틴 회중시계는 뒷면에 황가의 문양인 이화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순종의 역사적 평가와 의미 📚
순종은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1907-1910)은 결국 국권 상실로 이어졌지만, 이는 순종 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각축 속에서 힘을 잃어가던 조선의 시대적 비극이었습니다.
순종이 즉위했을 당시 이미 일본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그의 건강 문제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에게 민족의 상징으로 남아있었으며, 3.1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서 왕조에 대한 충성이 민족 독립의 열망과 결합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종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
-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동갑이었으며,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과는 단 1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음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동갑이자 김구와는 겨우 2살 차이였음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 근처의 고종 어극 40주년 칭경 기념비 현판 글씨는 그가 황태자 시절에 쓴 것임
- 다른 가문의 족보를 달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보학(譜學)에 밝았음
- 1922년에 촬영된 영상이 현존하는 유일한 영상 기록임
- 대한제국 시기 연호인 '융희(隆熙)'는 1907년 8월 3일부터 사용되었음
-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진은 순종 사후 1928년 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임
순종의 시대는 한민족에게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민족의식이 싹트고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른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순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통해 우리는 국가의 독립과 주권의 소중함, 그리고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내부 역량 강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마지막 기록인 순종실록은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518년 동안 한반도를 이끈 27명의 임금 이야기가 끝을 맺었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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