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8요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일주일은 7일까지밖에 없는데, 8요일이라니. 어딘가 비현실적이면서도, 왠지 모를 희망을 품게 하는 단어죠.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바로 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고전 소설, <8요일>입니다. 1950년대 암울한 폴란드를 배경으로, 스물여섯 살의 젊은 작가가 그려낸 청춘의 절망과 갈망이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인데요.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사방이 꽉 막힌 1950년대 폴란드: 숨 쉴 틈 없는 청춘들
소설의 배경은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잿빛이 되어버린 1950년대 폴란드입니다. 주인공 '아그네시카'는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지만, 그 현실은 낭만과 거리가 멉니다. 자기 방 한 칸 없이 병든 어머니의 히스테리와 무기력한 아버지의 절규가 가득한 집에서 살고 있죠. 부엌 한쪽에는 알코올에 절어 사는 오빠 '구제고지'의 침대가, 또 다른 한쪽에는 더부살이하는 남자의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죠?
오빠 구제고지는 친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안 경찰이 들이닥치는 현실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는 동생 아그네시카에게 이렇게 토로하죠.
"이 세계에서 솔직한 감정과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은 '죽느냐, 사느냐' 이것 때문에 피난처를 발견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
이처럼 개인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이 억압된 사회에서 청춘의 사랑과 꿈은 어디에 발붙일 수 있을까요?
사랑을 위한 단 한 평의 공간: "벽, 네 개의 벽이라도!"
아그네시카에게는 지독히 가난한 연인 '피에트레크'가 있습니다. 둘은 이 골치 아픈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싶지만, 단둘이 있을 공간조차 없습니다. 카페, 공원, 극장을 전전하며 짧은 만남을 이어갈 뿐이죠.
아그네시카의 갈망은 소박하지만 처절합니다.
"벽, 네 면의 벽, 아니 세 면이라도 좋아. 세 면이라도 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방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럼, 그런 방이 어디 없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바라는 것은 거창한 집이 아닌, 그저 외부와 차단된 '네 개의 벽'뿐입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가요. 😥 하지만 이 최소한의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연인들의 절망은 깊어만 갑니다. 급기야 피에트레크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감옥 생활이 그립다"는 해괴한 푸념까지 늘어놓게 되죠.
기다리던 '8요일'이 왔지만… 절망에 잡아먹힌 순간 🌀
소설의 제목인 '8요일'은 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완벽한 '내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갈망의 그날을 상징합니다.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는 '그날'이 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사랑도 행복도 그날로 미뤄두죠.
소설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마침내 피에트레크가 방을 빌리고, 오빠의 애인이 돌아오는 등 '8요일'의 서광이 비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스스로 그 손을 놓아버립니다. 오랜 절망이 충동으로, 희망을 걷어차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죠. 기다림에 지쳐버린 영혼은 마침내 찾아온 희망을 감당할 힘조차 잃어버린 것입니다.
70년 전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 (feat. 주택문제)
70년 전 폴란드 청년들의 절규가 202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택 문제로 결혼과 출산을 미루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N포 세대'가 되어버린 오늘날 청년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네 개의 벽'을 갖기 위해 오늘의 많은 것을 유예하고 있는 현실이 소설 속 상황과 닮아있죠.
<8요일>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완벽한 '8요일'을 마냥 기다리며 오늘의 행복을 미루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고 말이죠.
당신의 '8요일'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마렉 플라스코의 <8요일>은 단순한 시대 비판 소설을 넘어, 인간 본질과 희망, 그리고 절망의 메커니즘을 깊이 파고드는 고전입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인물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국가적인 불행이 내리누르는 암울한 시대가 아니라면, 어쩌면 '네 개의 벽'과 '8요일'은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충동과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작은 행복의 조각들을 그러모으는 용기. 그것이 이 묵직한 고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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