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드라마 <파리의 연인> 명대사, "이 안에 너 있다" 기억하시나요? 한때 대한민국을 설렘으로 물들였던 이 로맨틱한 고백의 '원조 맛집'이 무려 700년 전 중국에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오늘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통해 소개된 시는 바로 그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원나라 여성 시인이자 화가 관도승(管道升)의 '아농사(我儂詞)'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단숨에 돌린 그녀의 지혜로운 사랑 노래,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원나라 대표 예술가 부부, 관도승과 조맹부: 금실에 금이 갈 뻔?
관도승(管道升, 1262~1319)은 원나라 시대 '묵죽(墨竹)의 명인'으로 불릴 만큼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던 여성 화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조맹부(趙孟頫)였죠. 늦은 나이에 결혼했지만, 서로를 끔찍이 아끼며 예술적 영감을 나누던 그야말로 '소울메이트' 부부였다고 합니다. 꿀 떨어지는 신혼... 아니, 중년부부였지만, 그 사랑만큼은 여느 신혼부부 못지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이토록 금실 좋던 부부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중년에 접어든 조맹부의 마음에 다른 여인이 들어온 것이죠. 당시 사대부들이 첩을 두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지만, 누구보다 아내를 아꼈던 조맹부도 차마 이 말을 직접 꺼내긴 어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슬쩍 시 한 편을 지어 아내에게 건넸다고 하는데요, 그 내용인즉슨 "나도 이제 다른 학자들처럼 젊은 여인들을 좀 곁에 두어야겠소. 당신도 나이가 있으니 너무 나만 독점하려 하지 마시오." 였습니다. 왕학사(왕안석)나 소학사(소동파) 같은 유명 학자들까지 거론하며 에둘러 말했지만, 듣는 아내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겠죠. 요즘 같으면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며 등짝 스매싱 각이지만, 그때는 또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씁쓸하죠. 😥
질투 대신 지혜를! 관도승의 신의 한 수, '아농사(我儂詞)' 📜
남편의 배신 아닌 배신 예고에 관도승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눈물로 호소하거나 분노를 터뜨렸을까요? 놀랍게도 그녀는 차분히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 한 편을 남편에게 건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된 '아농사(我儂詞)'입니다.
아농사(我詞) 관도승
당신과 나, 너무나 정이 깊어 불같이 뜨거웠지.
한 줌 진흙으로 당신 하나 빚고 나 하나 만드네.
우리 둘 함께 부수어 물에다 섞어서는
다시 당신을 빚고 나를 만드네.
내 속에 당신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네.
살아서는 한 이불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네.
관도승(管道升, 1262~1319): 원나라 때 여성 시인이자 화가.
한 줌 진흙으로 당신과 나를 빚고, 그걸 부숴 다시 섞어 당신과 나를 만든다니... 이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비유인가요! 첩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오직 두 사람의 완전한 일체감과 운명 공동체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은 조맹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정신이 번쩍 들었겠죠? "아차, 내가 잠시 미쳤었구나!" 하고요. 😄
"내 속에 당신, 당신 속에 나" – 불멸의 사랑 고백
시의 핵심 구절, "我泥中有爾, 爾泥中有我 (내 속에 당신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네)"는 지금도 중국 연인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는 사랑의 명구라고 합니다. 마치 드라마 <파리의 연인> 속 이동건 씨의 대사처럼 말이죠.
흥미롭게도 이 구절의 진짜 원조는 원나라 희곡 <서상기(西廂記)>의 여주인공 앵앵(鶯鶯)이 연인 장생(張生)에게 한 말이라고 하네요. <서상기>는 젊은 서생과 명문가 규수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우리의 <춘향전>과 살짝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좋겠어요. 관도승은 이 대사를 차용하여 부부간의 변치 않는 사랑을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시킨 것입니다.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죠? 😉
시 한 편으로 되찾은 사랑, 그리고 '생동금 사동혈(生同衾 死同穴)'의 약속
관도승의 지혜로운 시 한 편은 조맹부의 마음을 완벽하게 되돌렸습니다.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예술가로서의 경지도 함께 더욱 높아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만합니다.
시간이 흘러 관도승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남편 조맹부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배 위에서 아내를 잃는 슬픔을 겪었죠. 그는 죽은 아내를 고향으로 데려와 장사를 지내고 홀로 지내다 3년 뒤, 아내 곁에 합장되었다고 합니다. "살아서는 한 이불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네 (生同一個衾, 死同一個槨)" 시 속의 마지막 구절이 현실이 된 순간입니다. 뭉클하죠? 😢
7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레시피: 진심 한 스푼, 지혜 두 스푼
관도승의 '아농사'는 단순한 사랑 시를 넘어, 관계를 지키는 현명함과 진심의 힘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때로는 직설적인 분노나 질투보다, 마음을 울리는 진솔한 한마디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죠. 7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관도승의 이야기. 여러분의 관계 레시피에는 어떤 특별한 재료가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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