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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모던 걸'과 소비 열풍: 일제강점기 경성 백화점의 역설적 번영

남조선 유랑민 2025. 4. 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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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모던 걸'과 소비 열풍: 일제강점기 경성 백화점의 역설적 번영

 

인구 40만 명의 식민지 도시에 5개의 대형 백화점이 성업했던 아이러니한 역사. 1920-30년대 경성의 번화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오늘날 '된장녀'와 유사한 비판을 받았던 당시 '모던 걸'들의 소비 문화와 경성 백화점의 역설적 번영을 살펴봅니다.

모던걸

🏙️ 경성의 이색적인 풍경: 백화점으로 가득한 도시

1920-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현재의 서울)은 식민지 도시였지만, 특이하게도 백화점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인구 4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경성에는 미스코시, 미나카이, 히라다, 조지야 등 5개의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놀라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는 당시 인구 비례로 따졌을 때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 도쿄(인구 560만 명): 27개 백화점 점포
  • 오사카(인구 270만 명): 9개 백화점 점포
  • 경성(인구 40만 명): 5개 백화점 점포
  • 교토(인구 100만 명): 7개 백화점 점포
  • 나고야(인구 80만 명): 4개 백화점 점포
  • 고베(인구 70만 명): 3개 백화점 점포
  • 요코하마(인구 60만 명): 3개 백화점 점포

경성은 인구 대비 백화점 수가 일본의 대도시들보다도 많았던 셈입니다. 특히 혼마치(현재의 명동 일대) 지역부터 남대문로에 이르는 구간에 백화점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모던걸

👗 '모던 걸'과 '모던 보이': 새로운 소비 주체의 등장

이렇게 경성에 백화점이 성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새로운 소비 계층인 '모던 걸'(Modern Girl)과 '모던 보이'(Modern Boy)의 등장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스코시 백화점의 풍경

1929년 1월 '별건곤' 잡지는 미스코시 백화점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경성우편국을 끼고 돌아서면 요지경 같은 진고개다. 하라다 상점에 들어서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그래도 놀라지 말라. 반수 이상이 조선남녀다... 미스코시에 들어가니 아래층은 음식과 과자를 팔고, 이 층으로 가니 거기는 일본 옷감뿐이더라. 삼 층에 가니까 장난감, 학용품, 아동복, 치마감이 있다. 길거리에 나서니 진고개 2정목, 3정목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나는 조선 부인들…."

 

당시 백화점의 주된 고객은 여성과 학생들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혼마치 상가의 주요 구매자로 등장하면서 일본 상점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 당대 언론의 비판적 시각: '모던 걸'은 '못된 걸'?

흥미롭게도 당시 언론은 이러한 소비 열풍을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의 '된장녀' 논란과 유사한 비판이 1920년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별건곤의 비판

'별건곤'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조지야 하라다 상점 같은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이다. 그곳들이 특별히 값이 싸서 그런 게 아니라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미스코시, 오복점(기모노점)이 또 낙성되었으니 제일 기뻐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같다. 어쨌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보다."

동아일보의 비판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자 기사에서도 비슷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요사이 우리 사람들은 외국 물건이라 하면 입 다물고 다투어서 쓰는 경향이 있다. 같은 외국 물건이라도 기어이 본정 등지에 가서 사오는 형편이 많다."

이 기사는 본정 2정목의 일본인 잡화점에서 매일 약 1000원어치의 물건이 팔리는데, 그중 60%가 조선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미스코시 오복점 경성지점 고객의 절반 이상이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모던걸

🛍️ 백화점의 혁신적 영업 전략

그렇다면 백화점은 어떻게 이토록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백화점의 기원과 혁신적 판매 전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백화점의 기원: 파리의 봉마르셰

백화점의 역사는 18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문을 연 봉마르셰(Bon Marché)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업주 아리스티드 부시코(Aristide Boucicaut)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판매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1. 화려한 건축과 인테리어: 내외관이 극도로 화려한 건물로 '소비의 궁전'이라 불렸습니다.
  2. 정찰제: 흥정 없이 정해진 가격으로 판매했습니다.
  3. 대량 구매와 저렴한 가격: 대량으로 물품을 들여와 일반 소매점보다 15~20% 저렴하게 판매했습니다.
  4. 자유로운 반품: 고객 만족을 위해 자유로운 반품을 허용했습니다.
  5. 사교의 장소: 파리 최대의 사교 살롱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판매 방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20세기 초에는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호주, 남아프리카, 터키 등 세계 각지에 백화점이 등장했습니다.

경성백화점

🔍 경성 백화점 번영의 역설적 의미

경성에 백화점이 번성했던 현상은 단순한 소비 열풍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의 복잡한 모순과 변화를 반영하는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식민지 소비 문화의 이중성

식민지 조선에서 백화점은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서구적 '문명'과 '근대'를 경험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백화점에서 쇼핑함으로써 근대적 소비 문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식민지 경제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

'모던 걸'과 '모던 보이'로 대표되는 새로운 소비 계층의 등장은 조선 사회에 등장한 도시 중산층의 성장을 의미했습니다. 비록 당대의 비판적 시각을 받았지만, 이들은 변화하는 조선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존재였습니다.

민족 정체성과 소비의 갈등

외국 물건, 특히 일본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당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근대적 소비자로 살아가려는 조선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경성백화점

💭 오늘날의 시사점: '된장녀'에서 '플렉스'까지

1920년대 경성의 '모던 걸'에 대한 비판은 2000년대 '된장녀' 논란, 그리고 최근의 '플렉스' 문화에 이르기까지 소비 문화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소비와 정체성의 관계

소비는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1920년대 모던 걸들이 백화점에서 쇼핑함으로써 '근대적 여성'임을 표현했듯이, 오늘날 소비자들도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표현합니다.

소비 비판의 젠더적 측면

흥미로운 점은 소비 행위에 대한 비판이 종종 여성을 대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모던 걸'에 대한 비판, '된장녀' 담론 등은 모두 여성의 소비를 특별히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소비 문화 비판이 때로는 젠더 이슈와 결합됨을 보여줍니다.

상품화된 민족주의

일제강점기 언론이 일본 상품 구매를 비판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특정 국가 제품 불매 운동 등 소비와 민족주의가 결합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소비 선택이 단순한 경제적 결정이 아닌 정치적, 이념적 표현이 되는 상황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현상입니다.

📚 맺음말: 백화점, 근대성의 거울

100년 전 경성의 백화점 번영과 '모던 걸'들의 소비 열풍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닌,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변동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의 비판적 시각 속에서도 조선인들은 백화점이라는 근대적 공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모던 걸들을 비판의 대상이 아닌, 급변하는 시대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 주체적 인물들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소비 행위는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도 자신만의 근대성을 추구했던 노력이었을지 모릅니다.

경성의 백화점은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도 조선인들의 삶이 계속되었음을,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지금 명동에 서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옛 미스코시 자리)은 그 역설적 역사의 현장으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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