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실록] 현종: 예송 논쟁의 시대를 연 조선 제18대 왕, 15년간의 정치적 줄다리기 👑⚖️](http://t1.daumcdn.net/tistory_admin/static/images/no-image-v1.png)
예론(禮論)으로 타오른 붕당 정치의 불씨, 끝없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펼친 온건한 통치
효종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현종 👦
1659년, 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의 맏아들이 조선의 제18대 왕 현종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고,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특히 '예송 논쟁'으로 불리는 정치적 갈등이 그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현종은 즉위 당시 만 20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의 시대는 효종의 강력한 북벌 정책 이후 점차 사회적 안정을 되찾고 외부의 침략이 일체 없었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재위 15년 동안 서인과 남인 사이의 치열한 정쟁 한가운데서 살아야 했습니다.

예송 논쟁: 형식적인 예법 다툼과 정치적 갈등의 결합 📜
현종의 즉위와 함께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인 '예송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효종의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중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장자(長子)를 위한 상은 3년, 차남이나 그 이하 아들은 1년 상인 기년(朞年)을 치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서인의 대표자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니까 당연히 1년 상이 맞다"고 주장했고, 남인의 대표자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차남일지라도 왕위를 계승했으니 장남과 다름없다. 따라서 3년 상이 맞다"고 반박했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예법 문제가 아니라 왕위 계승의 정당성이라는 예민한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남인 측 윤선도는 서인들이 역모를 도모한다고까지 몰아세웠지만, 결국 그는 귀향 조치되고 현종이 더 이상 예론을 거론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두 번째 예송 논쟁이 발생합니다. 서인들은 이번에도 "효종을 장자가 아닌 차자로 여겼기 때문에 효종의 비도 차자비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장자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번 논쟁에서는 서인 내부 갈등이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가 남인 쪽 주장을 지지하면서, 현종은 결국 자의대비가 3년 상(긴 상복)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써 남인이 승리하고 정치적 권력의 흐름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현종의 개혁 정책과 실용적 접근 🌾
예송 논쟁의 혼란 속에서도 현종은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는 효종이 이루지 못한 대동법 시행을 완성했고, 토지 측량 및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실시해 세수를 확보했습니다. 화폐의 두께와 재질을 바꿔 위조 가능성을 줄이는 등 실용적인 정책도 시행했습니다.
군사 방면에서도 현종은 효종 못지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효종 때부터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던 북벌 계획은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중단하는 대신, 군비 증강을 위해 훈련별대를 창설했습니다.
또한 혈연 관계에 있는 친족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거나 시험관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상피법'을 제정했습니다. 이를 통해 특정 가문이 인사를 독점하거나 사적 관계로 부정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여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피제는 조선 후기에 들어 더욱 강화되어, 현대 공직 사회의 근간이 되는 제도로 평가받습니다.
경신대기근과
사회적 위기 🌧️
현종 시대는 뚜렷한 사회 발전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예송 논쟁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끔찍한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조선 인구의 최소 10%가 사망하는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때는 지구 기온이 내려가는 '소빙기'로, 세계적인 재난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에서도 온갖 자연재해가 전국적으로 나타나 거리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1670년에서 1671년 사이에 발생한 이 대기근은 '경신대기근'으로 불립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현종의 질병과 사망 😔
현종은 신하들의 권력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효종 대에 성장한 서인 세력을 예송 논쟁을 지렛대 삼아 약화시키면서 왕의 입지는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왕권을 제대로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현종은 병마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현종도 효종처럼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딸들이 연이어 죽은 뒤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현종은 복통과 설사에 자주 시달렸는데, 이는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이었습니다. 정통성 시비를 비롯한 엄청난 정치적 스트레스가 그의 건강을 위협한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선대비가 죽고 2차 예송 논쟁이 시작되면서 불면증과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재발했고, 결국 호흡곤란과 설사, 가슴 답답함을 호소하다가 1674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종의 역사적 평가와 유산 📚
현종은 15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예송 논쟁이라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대동법의 완성, 상피법 제정 등 실용적인 정책을 통해 국가 운영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그의 시대는 조선 후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과도기였으며,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왕권 강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적 논쟁과 경신대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는 현종 시대의 어두운 측면이었고, 그의 짧은 생애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현종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
- 제1차, 제2차 예송 논쟁의 중심에 선 왕으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예론 논쟁의 시대를 열음
- 대동법 완성, 상피법 제정 등 실용적인 정책 시행
- 혈연관계 있는 친족의 동일 관청 근무를 금지하는 '상피법'은 현대 공직사회의 근간이 되는 제도
- 경신대기근(1670-1671) 시기에 조선 인구의 약 10%가 사망하는 극심한 재해를 겪음
- 네덜란드인 하멜 등이 탈출에 성공하여 '하멜 표류기'가 유럽에 알려지던 시기
-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
- 예송 논쟁을 통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 왕
현종의 통치는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실용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 왕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짧은 생애는 조선 중기의 정치적 갈등과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읽을거리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실록] 경종: 짧고 굴곡 많은 통치, 노론과 소론의 정쟁에 휩싸인 조선 제20대 왕 👑⚖️ (12) | 2025.03.23 |
---|---|
[조선왕조 실록] 숙종: 환국으로 만든 강력한 왕권, 조선 제19대 왕의 46년 장기 집권 👑🔄 (10) | 2025.03.23 |
[조선왕조 실록] 효종: 북벌을 꿈꾼 군주, 8년의 짧은 재위로 꿈을 이루지 못한 조선 제17대 왕 👑⚔️ (9) | 2025.03.23 |
[조선왕조 실록]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왕, 삼전도의 굴욕을 겪다 👑🧎♂️ (10) | 2025.03.23 |
[조선왕조 실록] 광해군: 실리외교의 달인, 비운의 폭군으로 낙인찍힌 조선 제15대 왕 👑🌧️ (11) | 2025.03.23 |